니들이 어쩔건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법부의 행태를 바라보면, 더 이상 분노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지경에 이른다.
굳이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태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니들이 어쩔건데?”
내가 이렇게 판결해도,
내가 이렇게 판단해도,
내가 이렇게 말해도
과연 누가 나를 제어할 수 있겠느냐는, 그 오만하고도 냉소적인 질문 말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사법부를 통해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분노의 단계에 머물지 않는다.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해지고, 허탈함은 곧 분노로 이어지며, 그 분노는 다시 체념에 가까운 감정으로 가라앉는다. 그 바닥에는 하나의 공포가 깔려 있다.
이 상황에 대해 그 누구도, 그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릴 수 있다는 공포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문제다. 그러나 이 사태를 단순히 몇몇 판사의 일탈이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순간, 본질은 가려진다. 이는 특정 판사의 문제가 아니라,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실패의 모습이다.
사법부의 막장은 단순한 부패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희망을 짓밟고, 시민 개개인의 삶에 대한 기대를 말살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정치는 썩어도 다음 선거를 이야기할 수 있고, 행정부가 무너져도 정권 교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법부가 무너지는 순간, 시민은 더 이상 호소할 곳이 없다.
그 순간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한 주체가 아니라, 언제든 법의 처분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되짚고 말하는 순간조차, 오히려 ‘위험한 사람’, ‘법을 모르는 선동자’로 낙인찍히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내가 분노하는 지점은 단순하다.
“저 판결이 틀렸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저 판결을 뒤집을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공부해 왔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사법부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마치 신이 된 존재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무력감과도 닮아 있었다. 이미 모든 결말이 예정되어 있고, 인간이 아무리 선택해도 그 결과값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적 감각. 지금의 사법부는 시민에게 그런 존재로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막장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적 응징이나 일시적 분노가 아니다. 구조적 제어가 분명히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향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 사법부를 신성한 영역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판사 역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공적 기관의 구성원이자 공무원이다. 판결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 비판은 민주주의의 기본 기능이다. 그런데 왜 사법부에게만 이 민주주의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사법부 흔들기”, “법을 모르는 선동”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진다. 그러나 판결을 비판하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 태도야말로, 사법부 스스로를 권력의 영역, 더 나아가 신의 영역에 올려놓았음을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둘째, 기록하고 남기고 반복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 무기가 된다. 나는 법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지와 침묵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느낀다. 판결의 논리, 판사의 발언,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법률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판결이 상식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개인의 감정으로 소모하지 않고 문장으로 남기며, 기록하고 반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법부는 신의 영역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한 기능으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 또한 그 기록 중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셋째, 노출이다. 현실적으로 판사를 처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노출은 가능하다. 어떤 판사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선택을 반복해 왔는지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개별 판결로 보일 때는 흩어진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축적되면 패턴이 되고, 패턴은 결국 사회적 쟁점이 된다. 권력은 처벌보다 명명(命名)을 두려워한다. 한 판사가 반복적으로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인물로 기억되고, 그의 이름이 그 판결과 함께 계속해서 거론될 때, 그 이름 자체가 기록이 된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희망 사항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명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이익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법을 믿으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 믿음은 2025년 윤석열 내란 재판을 거치며 완전히 무너졌다. 판결문을 읽으며 나는 언어의 위선을 정확히 목격했고, 사법부를 비판하면 왜 시민이 위험한 존재가 되는지, 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당장 바꾸지 못하더라도 침묵하지 않는 것.
노출시키고 기록하여 그들에게 불편한 징후가 되는 것.
판결문 한 줄 한 줄에 더 큰 신중과 책임을 요구하는 존재가 되는 것.
판사라는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 이름이 다시 존중받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이 글을 남긴다.